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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원 민주사회교육원 강의


러시아 문화사를 통한 국민의식 이해와 정교정신

2004.7.9



1. 시작하는 말
2. 비잔틴 문화의 러시아화
3. 정교협동정신(政敎協同精神)
4. 모스크바 중심사상(中心思想) 시대, 제 3의 로마
5. 옛 예식수호자들
6. 국가체제에 편입된 러시아정교회
7. 무신론 공산주의 와 시민정신의 혼돈(混沌)
8. 시민사상과 정교정신(正敎精神)의 회복
9. 정교협동정신(政敎協同精神)의 복원(復元)
10. 맺는 말



1. 시작하는 말

오늘날 러시아연방은 아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발전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의 러시아는 시민의식을 재통합 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축적해온 여러 가지 경험과 인적 물적 자원을 잘 활용해 나아갈 것이며, 큰 번영을 이루게 될 것으로 봅니다.
러시아연방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우리나라와는 이웃으로서 남.북한 양쪽 모두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방면에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연방은 우리나라, 대한민국과 여러방면에서 지속적인 친선교류의 폭을 증대하는 중에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봅니다. 한.러 양국민은 진실하게 서로에게 배우면서 서로 협력하는 중에 상호이익을 창출해 내면서 함께 평화공영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러시아국민의식과 러시아정교정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는 두 가지를 따로 떼어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러시아문화사의 흐름속에서 러시아국민의식과 정교정신을 통합적으로 말하고자 합니다.


2. 비잔틴 문화의 러시아화

1) 러시아의 세례(洗禮)
AD 955년, 키예프 러시아의 황녀 올가가 러시아공국에서 최초로 그리스도교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올가의 손자 블라디미르(재위980-1015)대공이 그리스도교 정교회에 귀의하였고 비잔틴제국의 황제의 누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정교회는 1917년까지 러시아의 국교로 되었습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키예프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 하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성직자, 성물, 십자가 등 교회에서 필요되는 모든 것들이 수입되었습니다. 백성들은 강가에서 집단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당이 세워지면서 십일조 헌금도 시행되었습니다. 국교로 된 정교회는 도시중심으로 성당을 세웠습니다. 지방의 시골에는 14-15세기 까지 아직 비정교회 종교들이 남아있었습니다.

2) 사회정의(社會正義)와 형법(刑法)
블라디미르 대공은 사회정의 구현을 강조했습니다. 10세기 이래로 중세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을 러시아는 실행하였습니다. 한 예로서 궁중에서 연회가 있을 때는 늘 병든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르코스(재위 1113-25)는 가난한 이들, 고아들, 과부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결코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으며 다음 대에서도 실행하도록 유언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법전을 받아들일 때 인간존엄성을 짓밟는 조항은 모두 삭제했습니다. 고문이나 절신형이나 사형은 폐지되었습니다. 러시아의 형법에는 신체에 형벌을 가하는 어떠한 조항도 없었습니다.

3) 수난자, 보리스와 글레브
1015년 블라디미르가 죽자 권력투쟁인 왕자의 난이 생겼습니다. 맏형 스비야토폴크는 자기가 권좌에 오르는데 두 동생 보리스와 글레브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은 동생들을 죽이려 자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두 동생 보리스와 글레브는 형의 간악한 음모를 알고도 참극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정신으로 충만하였기에 자원으로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복음 때문에 피를 흘린 두 형제 보리스와 글레브에게는 순교자와는 또 다른 정치적 희생자로서 “수난당한 자들”이라는 칭호가 수여되었고 시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순결하고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였슴으로 러시아인들에게는 역사를 통하여 귀감이되고 있습니다.


3. 정교협동정신(政敎協同精神)


체사로 빠삐즘(케사로 파피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잔틴제국에서는 처음부터 체사로 빠삐즘 사상을 도입했습니다. 황제는 백성들의 현세적 보호와 통치를 맡고, 빠빠 또는 빠뜨리아르흐(족장, 장교부, 교회의 최고수장)는 백성들의 영혼을 돌보며 정신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분담하여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사상을 말합니다. 이 사상은 이론 보다 실행이 더 어려웠다는 것은 역사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잔틴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 ?
서도 많은 백성들이 지상의 나라를 하늘나라의 이콘(이미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초자연계의 가시적 현상으로 본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 사상의 일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워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서 건설한다는 갸륵한 마음이었다는 일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국난을 당하여 나라와 백성들이 도탄에 빠질 때는 이 사상은 잘 실현된 사례가 많습니다.

1) 키예브 러시아의 몰락(沒落)
키예프 러시아는 비잔틴제국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도 교류하였습니다. 키예브 러시아는 라틴교회와 라틴사회 문화도 잘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키예프 러시아는 비잔틴, 라틴 양대 문화 모두를 잘 받아들여 독립적인 키에프 러시아 문화를 이룩하려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키예프 러시아는 갑작스럽고 비참하게 몽골의 침략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도시는 불타버리고 길가에는 남자들의 머리만 산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키예프 러시아의 아름다운 문화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러시아문화사에서는 황금시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2) 몽골의 (植民地 時代) -1237-1480-
몽골의 식민지 지배 240여년 동안 러시아국민의식은 정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몽골에 대한 러시아국민들의 저항의식은 러시아정교회와 밀접한 협력관계 속에서 추진되었습니다. 모스크바가 아직 도시로 발전하기 전의 상항이었습니다. 1326년까지 전러시아의 수좌대주교였던 뾰뜨르는 시골이었던 모스크바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의 압제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을 선 손꼽히는 어른들은 대표적으로 성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폐름의 성 스테판, 라도네쯔의 성 세르게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① 성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는 노보그라드의 대공으로서 러시아의 위대한 정교신앙의 수호전사(戰士)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서방의 적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노보고라드는 몽골의 지배 밖에 있었으며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조공을 바쳤습니다. 몽골은 정교신앙생활에 대해서는 방해하지 않았으나, 서방의 적은 정교회를 로마교황의 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1204년, 독일의 십자군은 러시아의 노보그라드 정교회를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라틴주교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좌(빠뜨리아르히)에 앉혔습니다. 알렉산드르 네브스키는 “정교회는 사도전승의 신앙을 지키며 그 가르침을 전하고 있으며, 세계 일곱공의회의 가르침을 빈틈없이 보전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로마교황 군대의 창 칼에 맞서 싸웠습니다. 알레산드르 네브스키는 1240년에 스웨덴에게, 1242년에는 독일 십자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② 페름의 성 스테판은, 러시아정교회 대주교로서 침략자들 사이로 들어가서 복음선교를 하였습니다. 1261년, 스테판 대주교는 볼가강가에 있는 몽골의 도시에 선교주교로 상주하였습니다. 그는 이콘 작가로서 이교인들에게 이콘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설명했고, 슬라브인들의 스승인 끼릴과 메포디오가 교회 슬라브어를 창안하여 슬라브민족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 처럼, 고대 루운문자를 이용하여 북방 이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많은 선교사들도 러시아의 극북, 극동북쪽의 이교인들에게 그들의 고유한 언어와 전통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정치적 정복의 목적은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정신으로 나라와 정교회를 지킨 성인으로 추앙받습니다.

③ 라도네쯔의 성 세르게이는 귀족가문의 출신이었지만 농부로 생활하였습니다. 대수도원의 원장임에도 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장작을 패거나 부엌바닥을 쓰는 등 남들이 회피하는 일을 즐겨했습니다. 성 세르게이는 정치적 소신도 분명하였던 것 같습니다. 모스크바의 대공 듀크와는 친구 사이로 러시아의 독립에 대해서 의기투합되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이 몽골에 저항하는 굴리코프 전쟁에 나아가기 전에 성 세르게이를 방문하고 축복기도를 받았다는 것은 의미 깊은 일로 보여집니다.
성 세르게이는 도시와 떨어진 광야에 수도원을 세우고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광야를 개간하여 농토로 바꾸면, 거기에 가난한 이들이 모여와서 함께 생산에 참여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평화마을을 형성 시켰습니다. 성 세르게이의 가르침 중에서, 교회는 백성들에게 신비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을 가르치며 인도하는 동시에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측면도 가르치면서 계도해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 세르게이는 수도생활에서 신비적, 사회적 양면을 잘 조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성 세르게이는 이러한 형태의 평화로운 수도원 마을을 생전에 50개나 건설했고, 그의 사후에는 그 제자들이 근 50여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성 세 르게이는 러시아의 창설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러시아국민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오늘날까지 모스크바 외곽 성 세르게이 라브르 라고 부르는 성 삼위일체 대수도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의 제자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성 삼위일체 이콘은, 성 세르게이의 성삼위에 대한 열절한 사랑과 그의 제자들이 스승님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려졋는데 대수도원의 현관에 안치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 이콘의 원본은 아직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이콘의 복사본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삼위 이콘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4. 모스크바 중심사상(中心思想) 시대, 제 3의 로마

1453년,비잔틴제국은 터키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제 동방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위시하여 모두 터키 수하에 들어갔으나 유일하게 러시아 만이 자유롭게 남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풍전등화와 같은 함락의 위기의식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을때, 서방 라틴교회 중심으로 플로렌스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로부터 군사적 도움을 바라면서 공의회의 결정을 모두 수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의 많은 성직계와 백성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러시아는 플로렌스 공의회를 수용한 콘스탄티노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 러시아정교회의 독립
러시아는 1448년, 자체적으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모스크바의 수좌대주교를 독자적으로 선출하였고 모스크바 중심의 교회를 자주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뒤늦게 플로렌스와의 연합을 포기함으로써 모스크바와 일치는 환원되었고,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독립교회가 되었습니다.
1472년, 이반 III세(재위1462-1505)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질녀소피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제 모스크바의 대공 호칭은 황제(짜르)로 바뀌게 되었으며, 머리가 둘이고 몸은 하나인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문장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모스크바 중심 러시아는 정치, 종교적으로 비잔틴의 계승자로서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2) 제 3의 로마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로마는 이교도로 넘어가 이단으로 타락했고, 두 번째 로마는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넘어가서 터키에 의해 벌을 받았고, 마지막 로마는 모스크바로서 정교 그리스도계 중심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계승자라 했습니다.
제3의 로마라는데 대한 개념은, 일종의 메시아니즘을 일어키기도 했고 또 종교적 정치적으로 짜리즘이란 목적에 사용되기도 했고, 러시아인 스스로 는 선택된 백성으로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3) 비소유자들과 소유자(所有者)들 간의 갈등
정치, 종교적으로 자리가 잡힌 모스크바 중심 러시아는, 몽골식민지 치하의 비통한 역사속에서 선열들이 물려준 정교협동(政敎協同) 정신을 망각한 듯 사상의 분열로 서로 극단으로 대립하는 현상이 생겼습니다. 1503년, 러시아정교회 공의회서 교회의 재산소유에 관한 시비가 팽팽하게 서로 맞서서 상대를 공격하였는데 어떠한 합의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소로스키의 닐(1433-1508)은 수도원의 토지소유에 대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볼로치키이 대수도원장 요셉(1439-1515)은 수도원의 토지소유권을 옹호하였습니다. 공의회 참석자중 대다수는 요셉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닐의 주장에 찬동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닐은 볼가강 맞은 편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닐과 은수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비소유자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후 20년간 소유자 비소유자 서로는 일치를 못하다가 정치권력에 의하여 은수자(비소유자)들의 수도생활의 장은 폐쇄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비소유 수도생활 전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 소유자들의 수도생활 전통중에는 수도생활의 사회적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 병자를 보살피는 일, 가르치는 일 ...등 사회봉사 내지 자선사업에는 돈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수도원의 토지소유를 주장했습니다.

- 비소유자들의 수도생활 전통중에는 사회봉사나 자선사업은 평신도들이 하게하고 수도자들은 기도생활로서 남을 돕는 것이라 했습니다. 수도자들은 세상과 떨어져 청빈의 생활을 해야 초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단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문, 채찍질, 투옥 등 어떠한 폭력에 의한 인간존엄성을 짓밟는 일은 교회의 수도원이 자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 소유자들은 경우에 따라서 합당한 징벌은 필요하다고 맞섰습니다. 소유자들은 제 3의 로마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상의 나라와 하늘나라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단한 애국자요 국가주의자들이었습니다.

- 비소유자들은 예언자적 수도생활을 하였고, 지상에 있는 교회는 언제나 순례자의 입장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이 양 편은 평행선을 달리는 듯 서로의 견해를 수용하지 못헀습니다. 신도들의 영적생활 향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생활문화도 서로 다르게 이끌었습니다.

- 소유자들은 신도들의 영적성장을 위해서는 훈련과 규칙준수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위치를 역설했습니다. 공동의 신앙,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있지만 성당에 모여 한 목소리로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릴때 모든이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중에 감사의 잔치가 행복감 속에서 하느님께 봉헌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 비소유자들은 아름다움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수도자는 외적 청빈 뿐 아니라 탈아(脫我)로 자신을 봉헌해야 하며, 아름다운 이콘이나 교회음악에 대한 애착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끼이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주의했습니다. 그리고 닐은 전례 보다는 신비적 기도에 관심을 더 많이 두었습니다. 그는 소르스키이에 정착하기 전에는 아토스산에서 수도자로 살면서 비잔틴의 이시하스모스 전통을 직접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후일 러시아정교회는 닐, 요셉 모두를 시성했습니다. 둘은 라도네쯔의 세르게이의 한 부분이라 하지만 결코 한 부분 이상은 아니라는 평이 있습니다. 이 둘이 상호 보완관계로 발전하는 중에 충돌로 발전된 것은 매우 슬픈 일인 것입니다. 비소유자들이 없는 러시아정교회의 영성생활은 일방적이고 불균형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소유자들은 국가(정치)와 교회 간의 긴밀한 협동, 러시아의 국가주의, 신앙의 외적형태에 대하여 그들은 헌신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그 고유한 자치권을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늘 진실과 정의를 크게 외쳤습니다.

한 예로서 모스크바의 수좌대주교 빌립보는 이반(1569 졸)의 거짓과 불의에 정면으로 항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반은 그를 구금하고 교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보”로 알려진 복자 바실리오는 바보이기 때문에 아무도 갖지못한 정직함으로써 사회적 비리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바보는 “살아있는 양심” 이었기에 이반은 바보의 빈틈없는 견책에 귀를 기울렸습니다. 이반은 그 바보에게 벌을 주는 대신 그에게 특별한 예우를 하였다고 합니다.
1589년, 제 3의 로마라 불리던 모스크바에 총대주교좌가 설정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동방정교회에서, 대표적 지위에서 활동했지만 그 서열은 동방에서 다섯 번째가 되었습니다.


5. 옛 예식수호자들

닐,그리고 비소유자들과 요셉, 소유자들 간의 충돌은 정치권력에 의해 슬픈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그 슬픈 결과의 영향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견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17세기는 불화의 시대로 알려진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러시아 내부의 분열로 인해서 국토는 외부로부터의 희생물로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13년 이래로 러시아는 급격한 회복을 이루었습니다. 그 다음 40년 간은 국가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재건과 개혁의 시기였습니다.

한 편 교회에서는 예식서의 개정을 놓고 찬반 양론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옛 예식수호자들의 대표는 대사제 요한 네로노프 와 아바쿰 뻬트로비치 였고, 새 예식개정 주장자들의 대표는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필라렛 과 성 세르게이 라브르의 대원장 디오니시 였습니다.
옛 예식 수호자들(러시아 전통)은 닐, 곧 비소유자들의 입장인 듯 하였고, 새예식 개정자들(그리스 전통)은 요셉, 곧 소유자들과 같은 입장인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옛 예식수호(러시아풍)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대표자 아바쿰은 10년간 추방, 22년간 투옥, 그 다음에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새
예식 개정(그리스풍)자들은 승리하였지만 대표격인 총대주교 니콘은 총대주교직에서 밀려났습니다. 니콘의 정치적 야욕은 교회를 정치체제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6. 국가체제에 편입된 러시아정교회

1) 시노드체제
니콘의 후임 아드리안 총대주교가 죽자 뾰뜨로(피터) 대제는 일방적으로 총대주교제를 폐지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12명으로 구성된 홀리 시노드(Holy Synod)를 만들어 황제 산하에 두고 교회를 억압하였습니다. 홀리 시노드 체제는 1917년 공산주의 혁명때 까지 20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러시아정교회의 시노드 시대는 분명히 정교회가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2) 서구문화의 유입
18세기 이래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었습니다. 특히 교회에는 서구의 신학이 들어오면서 교회의 미술, 교회의 음악들이 서구화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본래의 문화가 모두 서구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구화의 표면 뒤에는 러시아정교회의 진정한 생활이 중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주교들, 성직자들, 수도자들, 사목자들은 흔들림 없이 러시아의 문화전통인 정교를 잘 보전하였습니다.

3) 정교영성의 부흥
19세기, 시노드 시대는 분명 러시아정교회의 대 부흥의 시기였다고 합니다. 많은 뜻있는 이들은 서구문화를 맹목적으로 전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서구의 종교운동이나 문화적 영향에서 벗어나 정교(Orthodoxy) 연구에 몰두하고, 아토스산에서 수도영성에 대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한 후 귀국하여 정교전통을 보전하는데 이바지하였다고 합니다. 예로서 키예브 아카데미 출신 수도자, 파이씨 벨리츠코프스키는 아토스에서 수행, 수학한후 필로칼리아라는 성인들의 어록집을 러시아어 도브로똘류비예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1793년, 모스크바에서 발행) 그는 예수기도 수행을 강조했고, 스타르치에게 순종의 필요성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니아멧츠라는 대수도원을 건설했는데 500명의 수도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비록 그는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방문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 의해서 많은 수도원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1810년 러시아에는 452개의 수도원이 있어는데 1914년에는 1,025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4) 스타르치
이 수도원 운동은 16세기 이래로 억압받던 비소유자들의 전통을 교회생활의 중심으로 환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영적 수행에 대한 높은 발전으로 표현됩니다. 정교회에서 스타르치는 역사상 중요한 시기에 많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19세기는 탁월한 스타르치의 시대라고합니다. 19세기 스타르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사라보의 성 세라핌(1759-1833)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나 구원받으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실제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모습은 타볼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7. 무신론 공산주의 와 시민정신의 혼돈(混沌)

1) 공산주의 헌법
1917년 10월에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정권을 잡았습니다.
1918년, 공산주의 정권의 헌법은 종교적 자유와 반종교적 자유를 승인했습니다.
1929년에는 종교적 신앙의 활동과 반종교적 자유가 허락되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종교적 예배와 반종교활동의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종교신앙 활동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사전에는 교회의 개념을 “예배(전례)를 목적으로만 하는 단체”라고 기록했습니다. 1943년에는 남아있던 성당에서 예배를 집전해도 좋다고 허락되었습니다. 이 때까지의 구소련정책은 문화적 말살의 조직적이고 가혹한 정책으로서 그리스도교 정신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릴 설교는 할 수 있지만 종교교육적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선활동이나 사회활동은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정교회의 성직후보자들에게 전례훈련은 시킬 수 있으나 교육활동은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학교에서 무시론 사상교육을 시행하였습니다. 청년회 모임도 금지되었습니다. 성당에서 도서실을 가질 수 없고 성경책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예식서는 허락되었습니다. 출판물은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소책자 한권 얻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56년부터는 성경을 다시 출판할 수 있었는데 심한 제약 때문에 출판시설은 열악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신도들 중에서 누가 성경책 한 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행운아처럼 생각했다고 합니다. 교리반을 운영해서는 안되고 어린이 셋 이상에게 교리공부를 가르치면 형법(刑法)에 저촉되었습니다. 만약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하게 되면 12개월 징역형을 받게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종교자유는 거의 없었습니다.

큰 성당들은 무신론 공산주의 박물관으로 변했고, 수 많은 성당들과 교회 건물들은 영화관, 수영장, 체육관, 술집, 등 종교외적으로 변용되거나 폐쇄 또는 폭파시켜 버렸습니다. 이러한 무자비한 행동은 문화유산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민중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로, 무신론 공산주의 선전은 합법적이고 조직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투쟁하는 무신론자 연맹”이 결성되면서 전국적으로 무신론 선전강사들이 파견되었고, 반종교적 소책자, 정기간행물이 발간되면서 반종교 강연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54년도의 경우, 120,679번의 반종교 강연회가 열렸고, 1958년의 경우에는 반종교 강연회가 무려 300,000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종교적 집회가 부활절이나 성탄절 밤에 대규모 집회와 거리행진을 의도적으로 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의 정교회문화말살 정책적 활동들에 대해서 많은 시민들이 외면했고 뜻있는 청년들은 지하조직 운동으로 죽음의 질곡과 같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2) 공산주의 혁명 초기 상항
종교예배의 자유는 교활한 올가미로 해석됩니다. 공산주의 권력자들은 예배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놓고는 민중들을 감시하고 체포, 구금하고, 살해 유기하고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1918년 2월 5일에 정교분리(政敎分離)에 관한 헌법이 공포되면서 국교인 러시아정교회는 아무런 법적 권리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헌법은 정교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먼저 모든 신학교, 신학대학, 신학아카데미는 폐쇄되었습니다.(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부터는 몇 개는 문을 열었습니다) 모든 교회의 건물, 토지, 금전은 국가의 소유로 선포되었습니다.

1941년 까지만 해도 5만개의 성당들이 폐쇄되었고, 10만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희생되었고, 1460개의 수도원 수녀원들이 폐쇄도었습니다. 최고학부
인 아카데미가 4개 있었는데 모두 페쇄당했습니다. 50개의 신학교와 4,150개의 교회학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에는 교회에 대힌 탄압이 약간 덜 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먼저 제도교회를 와해시키고 교회의 교도권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것들을 강탈했습니다. 이제는 신도 개인을 하나 하나 공격하였습니다. 열심한 신도들은 반혁명분자로 분류되어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아야했습니다. 1917년에는 150명의 주교들이 한꺼번에 투옥되었습니다. 1918-1919 사이에는 28명의 주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1923-1926년 사이에는 50명 이상의 주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700명의 사제들, 2,000명의 수사신부들, 3,400명의 수녀들과 부제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공사주의 치하에서 어떠한 형태로든지 약 십수만 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처형되거나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5천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3) 해외러시아정교회
1918년 2월 1일, 당시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티콘은, “그리도의 적‘ ”우리 시대의 어둠의 무신론 지배자들“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파문하였습니다. 이러한 파문은 <러시아전체공의회-1917-1918>에서 확인하였고, 니꼴라이 II세 황제 암살을 단죄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정교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교도권을 마비시켰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제도마져 그들의 구미에 맞도록 고치려 교활하게 음모를 하였습니다. 소위 ”살아있는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배후에서 암약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민중들은 ”살아있는 교회“를 외면하였습니다.
1920년 티콘 총대주교는 교회가 약탈당하고 교도권이 무너진 상항에서 자기가 곧 투옥될 것으로 예견하고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의 권위를 공인하는 교령을 발표하였습니다. 1921년 해외러시아정교회의 주교들은 유고슬라비아 칼로프치에 모여 세르비아의 총대주교 입회하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 교령362호에 의거 해외러시아정교회 주교회의(시노드)를 출범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시노드 본부를 칼루프치에 두었으나 그곳의 공산화로 제2차 대전 후로 독일 뮌휀으로 옮겼다가 1949년도에 현재의 자리 뉴욕 맨하탄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최고지도자로서, 처음에는 키예프의 수좌대주교였던 안토니경, 그 다음에는 수좌대주교 아나스타시경, 세 번째는 수좌대주교 필라렛경, 네 번째는 수좌대주교 비탈리경, 지금은 라우르스 수좌대주교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8. 시민사상과 정교정신(正敎精神)의 회복

2차대전시, 독소전쟁에서 밀리던 소련공산주의 정권은 러시아정교회의 협력으로 승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1941년 부터는 공산주의 정권은 몇 개의 신학교와 두 개의 신학아카데미의 문을 다시 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당들도 하나 둘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론 공산주의 철권 정치는 수 십년 간 민중을 교회로부터 떼어놓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공산당 간부들 중에서도 비밀리에 성당에 출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린 아기들의 세례, 나이드신 어른들의 장례식도 성당에서 하기를 원하는 공산당 간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대축일에는 성당이 꽉 찰 정도로 민중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50년대에는 또 다시 공산주의 정권은 정교회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중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스크바 중심 러시아정교회는 WCC에 가입하였고, 서방세계와 교류를 증대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1980년대 부터는 소위 페레스트로이카 바람으로 교회에 대한 제약은 많이 줄어졌습니다. 1988년 러시아의 세례 1,00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정교회는 약진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교회와 구소련 사회에는 여명의 새벽을 맞이하는 듯 하였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정교회 관구에는 성당이 겨우 40여개가 있었는데 러시아연방이 출범하면서 400여개 이상의 성당이 열렸다고 합니다. 그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당문만 열면 곧 성당은 만원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2000년을 맞이하면서 공산당에 의해 피살된 니꼴라이 II세 황제가 성인의 반열에 올려지고(해외러시아정교회에 의해 이미 시성되었고, 모스크바에서는 추인함), 스탈린에 의해 폭파된 그리스도의 영광 대성당이 모스크바 한 복판에 복원됨으로써 이제 러시아 땅에서 무신론 공산주의는 발븥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9. 정교협동정신(政敎協同精神)의 복원(復元)

러시아연방의 국가적 상징 문장은 머리가 두 개이고 몸통이 하나인 독수리 모습입니다. 이 문장은 제정러시아의 국가적 상징과 같은 것입니다. 러시아연방은 국가와 정교회가 뗄 수 없는 일체로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기본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이 문장은 러시아연방의 국가기관이나 관공서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각 주청, 시청, 군청에 정교회 담당 행정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외 공관에도 정교회 담당관이 주재하고 있는줄로 압니다. 그리고 국영방송에서 정교강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말씀드리자면 이는 러시아연방정부와 러시아정교회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로 협동하여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고 러시아전통 정신문화인 정교정신을 전 국민에게 심어주어 보전하자는 깊은 뜻이 담긴 정교협동정책(政敎協同政策)의 일환으로 보여집니다.
때가 되어 본토 러시아정교회와 해외 러시아정교회 간에는 일치가 빠르게 잘 추진되고 있습니다. 먼저 러시아연방의 푸틴 대통령이 해외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수 차 방문하여 본토, 해외 양 교회 간의 일치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 답례로, 2003년 11월에는 시드니의 힐라리온 대주교와 해외러시아정교회 대표 사절단이 모스크바 알렉세이 II세를 예방했고, 2004년 5월에는 해외의 수좌(首座), 미트로뽈릿 라우루스경이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의 알렉세이 II새를 예방하였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본토, 해외 양 수장을 영접하여 하나인 러시아정교회를 선언했습니다. 본토와 해외 러시아정교회 일치를 위하여 푸틴 대통령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제는 서류상의 일치만 남았습니다.


10. 맺는 말

기다림의 신앙-빠루시아

러시아땅에서는 한 세기 동안 무신론 공산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상은 무너지면서 그 정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의 가슴 속에는 늘 인간사회의 제도는 불완전하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 어떠한 지도자나 제도나 이념에 대한 의존성은 탈피해해야 한다는 경향은 뚜렷합니다.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는 러시아인들의 의식 속에는, 러시아의 구원은 참 인간이며 참 하느님이신 총체적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오는날 러시아정교회 역시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으며, 그분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전인간(全人間), 개인,사회, 만물의 총체적 구원을 지향하는 신화(神化)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제 러시아는 민주주의 정치, 시장경제중심, 정교(正敎)를 국가사회의 정신문화의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후 러시아는 옛 러시아의 정통사상인 정교협동정신(政敎協同精神)을 계승하여 국가경영과 국민을 이끌어 가려는 경향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 한 사제의 짧은 이야기- 빠루시아 !


강사소개:
강 태 용 ( 姜 泰 鎔 )
해외러시아정교회 관할, 대한정교회 주관 대사제
현, 사단법인 한러협력연구소 이사장
대표저서:동방정교회,역사와 신학-도서출판 정교
대표역서:이름없는 순례자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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